※ 플랫폼뉴스는 주말마다 '말 놀이' 코너를 마련합니다. 어려운 말이 아닌 일상에서 자주 쓰는 단어와 문구 등을 재소환해 알뜰하게 알고자 하는 공간입니다. 어문학자같이 분석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가볍게 짚어보자는 게 목적입니다.
오늘은 1950년 6월 25일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가 발발한 날입니다. 북한군이 새벽 4시에 소련제 전차(242대) 등을 앞세우고 한반도의 38선을 넘어 기습 침공한 것입니다. 일각에서 남침이 아닌 북침이란 극단 주장도 있었지만 소련 붕괴 직후 스탈린이 북의 김일성에게 남침을 승인했다는 '관련 자료'가 속속 나오면서 드러났습니다.
북침을 했다면 사전 준비를 했을 터이고, 준비를 못한 북한군을 치면서 북쪽으로 밀고 올라갔었겠지요. 우리군은 북한의 기습에 속수무책으로 후퇴만 후퇴만 하다가 부산 직전까지 밀렸습니다.
그런데 6·25를 '사변(事變)'으로 주로 써왔는데 어느 때부터 사라지고 '전쟁'으로 통일이 됐습니다.
그 이유를 알아봅시다.
사전적으로 사변은 '사람의 힘으로는 피할 수 없는 천재(天災)나 큰 사건', 그 밖의 큰 변고'(1), '전쟁까지는 이르지 않았으나 경찰로는 막기 힘들어 군병력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는 국가적 사태나 난리'(2), '선전포고 없이 이루어진 국가 간의 무력 충돌'(3)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한국에선 주로 (2)와 (3)의 의미로 씁니다. 6·25사변은 (3)의 뜻인 '북한군이 선전포고 없이 새벽에 기습적으로 공격을 해서 발생했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습니다.
우리에겐 이처럼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지만 남북한 간에 뉘앙스 차이가 있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북한에선 지난 1960년 때부터 놀랍거나 즐거운 일도 '사변'으로 표현한다고 하네요.
즉 우리는 만주사변, 을미사변과 같이 주로 역사적이고 부정적인 일에만 쓰는데, 북한에선 일상적인 일과 긍정적인 일에도 사용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북한에서도 ‘을미사변’을 사용해 부정과 긍정 두 쪽을 다 사용한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허! 이건 굉장한 사변인데. 봉서는 쓰거운 웃음을 눈가에 띄우며 씨까부렸다”(조선단편집)라든가 “새 북부 철길의 개통은 두메산간오지에서도 기관차의 기적소리 울려퍼지게 하는 또 하나의 커다란 사변이였다”(조선말대사전) 등입니다. 씨까부리다는 남의 비위를 건드리면서 놀려댄다는 의미입니다.
외변(外變)이란 단어도 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사변이나 외적이 쳐들어와 일어난 사변을 말합니다.
다음으로 전쟁(戰爭)의 뜻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단어로 '국가 또는 교전 단체 사이에 서로 무력을 써서 하는 싸움'입니다.
두 단어를 비교해보면 '사변'은 '전쟁'의 하위개념으로도 볼 수 있겠네요.
결론을 슬슬 내봅시다.
국내 법률에서는 '6·25사변'과 '6·25전쟁(또는 한국전쟁)' 용어를 혼용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종전에는 '6·25사변'으로만 사용했으나 남북 화해 및 협력 분위기에다 남북한의 UN 동시가입(1991년) 등으로 국가 간의 전투를 뜻하는 전쟁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전에는 북한을 단일 국가라고 인정하지 않았고, 독립된 국가 간의 전쟁이 아닌 한반도의 내전으로 보았기 때문에 사변이라고 했다는 의미입니다.
참전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의 경우 2000년 1월 28일 법 개정으로, 국가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에서는 2008년 3월 28일 법 개정 때 '6·25사변'을 각각 '6·25전쟁'으로 변경했네요.
하지만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서는 국가기념일의 하나로 6·25사변일을 정하면서 '사변'이란 표현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오늘 열린 정부 주최 행사에서도 '6·25전쟁 제71주년 기념식'으로 썼습니다.
참고로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의 명칭은 달리했습니다.
예를 들어 좌파적(혹은 공산주의) 시각에서는 '조선해방전쟁', 우파적 시각에서는 '6·25사변', 제3자적 입장에서는 '한국전쟁'으로 여러가지 표현 방법을 찾아 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국가보훈처 담당관은 25일 이와 관련 "해외 참전국에서는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에 한국전쟁으로 쓴다"고 덧붙여 설명했습니다.
과거 수정주의 역사관에서는 남침설보다 북침설을 추종하는 진보학자가 있었는데 소련(지금의 러시아)의 몰락 후 공개된 자료들에서 스탈린과 김일성 간의 '거래 내용'이 드러나면서 북침설은 사라졌다고 봐도 무방한 듯합니다.
아무튼 어떤 미화된 명칭을 붙여도 우리는 동족간의 수많은 희생의 참혹상을 잊지못합니다.
1950년 6월 25일~1953년 7월 27일, 3년 1개월 2일(1129일) 동안의 전쟁 피해를 살펴보겠습니다.
한국군은 사망자 13만 8000 여명, 부상자 45만 여명에 실종자를 포함하면 60만 9000 여명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북한군도 사망자와 부상자가 52만 여명이고 실종자를 합쳐 80만 명이라는 통계가 있네요.
또 유엔군은 사망자 5만 8000 여명, 부상자 48만 여명이고 실종자와 포로를 합치면 54만 6000 여명입니다.
중공군은 사망자 13만 6000 여명, 부상자 20만 8000 여명에 실종자와 포로, 비 전투 사상자까지 포함하면 97만 3000 여명의 인명 피해를 입었습니다. 인해전술로 인해 피해가 더 컸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민간인의 사망자가 더 많았습니다.
남한의 경우 민간인 사망자 24만 5000 여명, 학살 민간인 13만 여명, 부상 23만 명, 납치 8만 5000 여명, 행방불명 30만 3000여 명으로 모두 100만 여명의 민간인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위의 내용들은 국방부와 군사편찬연구소의 자료입니다. 그러나 한국전쟁유족회와 학자들은 한국인만 100만 명이 학살됐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1953년에 북한 민간인 사망자가 28만 2000명, 실종자 79만 6000 명이라고 공식발표했습니다.
이를 종합하면 당시 남북한 인구의 5분의 1이, 한 가족에 1명 이상이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회·경제적인 피해도 어마어마했지요. 남한의 경우 일반 공업시설의 40%, 북한은 전력의 74%, 연료 공업 89%, 화학공업의 70%가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폐허였지요. 지금도 남북의 많은 이산가족들은 서로의 생사마저도 모르고 한스럽게 살고 있습니다. [플랫폼뉴스 정기홍 기자]
저작권자 ⓒ 플랫폼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