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아연의 동행 10] 꽃인 듯 꽃이 아닌 듯
신아연
승인
2019.04.04 06:20
의견
0
[플랫폼뉴스 신아연 칼럼니스트]
봄이라지만, 4월이지만 아직도 바람이 차고 춥다. 봄소식, 꽃소식은 마치 달력 속의 일처럼 내게는 현실감이 없다. 새벽 네 시에 눈을 뜨고 커피를 끓여 책상 앞에 앉는다. 공깃돌 고르듯 두세 시간 언어를 만지작거리다 아침 한 술 먹고 책을 펼친다.
햇볕 들지 않는 방이지만 보송보송 마음에 곰팡이가 없는 것은 책과 글 덕이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봄이 오는지 겨울이 오는지 계절 모르고 살아간다. 소중한 것을 잃었고 많은 것을 빼앗겼지만 원래 내 것이 아니었기에 훌훌 털고, 사는 날까지 사는 것으로 족하다.
내가 철학을 전공했다고 라깡이 어쩌고 헤겔이 어쩌고, 나하고 그런 ‘이빨을 까자는’ 사람이 아직도 있다. 라깡은 누가 먹다 버린 새우깡인가? 철학은 무슨 개뿔! 점수 맞춰 들어간 대학일 뿐이다.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서양 철학 나부랭이는 집어치우고 말랑한 손자 궁둥이나 만져볼 수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 까다롭고 예민한 성격 맞춰 줄 사람 있을 리 없고, 이역만리 자식들과도 서먹하기만 하니 이 모든 것이 내 업 탓이리라. 나는 또 하릴없이 책을 펼치고, 봄날 아침 내 마음을 시 한 수에 얹는다.
늙어 기쁜 것은
인간 세상 두루 거쳐
속세의 밖을 알게 된 것이네
헛되고 공허함을 꿰뚫어 보고
바다 같은 한과 산 같은 근심을
단숨에 부서뜨렸네
꽃에 홀리는 일 없고
술로 인해 문란해지지도 않으니
어디서나 머리가 맑네
배부르면 잠자리 찾고
깨어나 장소만 있으면 놀이를 펼치네
고금의 일 말하지 말게
이 늙은이 마음속엔
그렇게 많은 일일랑 없다네
신선을 바라지 않고 부처에게 아첨도 않고
분주하게 공자를 배우지도 않는다네
그대와 다투기 귀찮아
웃도록 내버려 두니
이렇고 그저 이러할 뿐이네
세상 연극 다 마치고 나면
옷 벗어 어리석은 이에게나 주려 하네
– 주돈유 <염노교> / 고승주 편역 『꽃인 듯 꽃이 아닌 듯』
|
유영상 작가의 영상풍경 |
필자 신아연 작가는 대구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21년간을 호주에서 지내다 2013년에 한국으로 돌아와 인문예술문화공간 블루더스트를 운영하고 있다. 자생한방병원에 '에세이 동의보감'과 '영혼의 혼밥'을 연재하며 소설가, 칼럼니스트, 강연자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생명소설 『강치의 바다』 심리치유소설 『사임당의 비밀편지』 인문 에세이 『내 안에 개있다』를 비롯, 『글 쓰는 여자, 밥 짓는 여자』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 공저 『다섯 손가락』 『마르지 않는 붓』 『자식으로 산다는 것』 등이 있다.
플랫폼뉴스
신아연
shinayoun@daum.net
신아연의 기사 더보기
저작권자 ⓒ 플랫폼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