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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눈) 레터] 김기창 화백의 “벼씨 새끼트라(병신 새끼들아)”

온라인팀 승인 2021.05.20 20:16 | 최종 수정 2022.01.05 18:34 의견 0

※ 플랫폼뉴스는 SNS(사회적관계망)에서 관심있게 회자되는 글을 실시간으로 전합니다. '고전적 언론 매체'에서는 시도하기를 머뭇하지만, 요즘은 신문 기사와 일반 글의 영역도 점점 허물어지는 경향입니다. 이 또한 정보로 여겨주시면 고맙겠습니다. SNS를 좌판에서 한글 모드로 치면 '눈'입니다. 엄선해 싣겠습니다.

<‘벼씨 새끼트라!’-운보 화백 이야기>

운보 김기창(1914년~2001년)은 화가로서도 널리 알려져 있지만 청각장애로 인한 고통을 이겨낸 의지의 인물로 더욱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7살 때 장티푸스로 인한 고열로 청신경이 마비돼 후천성 귀머거리가 됐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이당 김은호 화백에게 그림을 배우고 1931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판상도무(板上跳舞)>라는 작품으로 입선하자 귀먹고 말못하는 18살 소년이 입선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해방 후 동료 화가인 우향 박래현과 결혼한 뒤부터 그의 삶과 예술은 크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내에게서 입으로 말하는 '구화법(口話法)'을 배우기 시작했고, 우향의 작품세계에서도 크게 영향을 받았다.

운보와 우향. 운보문화재단 제공

야생마의 움직임이 격정적인 구도로 나타나는 대작 <군마도>와 전통 가면극을 작품화한 <탈춤> 등의 연작으로 힘찬 운필을 구사한 것도 이때였다. 이밖에 1천여 마리의 참새 떼가 양편에서 날아와 치열하게 싸우는 모습을 담은 <군작>은 운보의 스케일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꼽힌다.

그러다가 평생의 반려였던 우향이 1976년에 타계하자 말할 수 없는 허탈에 빠진 그는 미친듯이 그림을 그리며 충북 청원에 <운보의 집>을 세우고 그 옆에 운향미술관과 도예전시관과 운보공방 등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운보 화백과 '청송교도소'에 얽힌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다. 재소자 교화를 위해 30여 년 간 전국을 뛰어다니며 사형수의 대부가 된 삼중스님이란 분이 있었는데 어느날 청송교도소를 찾아간 스님에게 교도소장이 재소자들의 정서를 순화시키려는 뜻에서 유명화가들, 그 중에서도 운보 화백의 그림을 꼭 기부 받고 싶다고 말했다.

그 뜻에 공감한 삼중스님은 전혀 만난 적이 없던 운보 화백의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그림을 기부 받을 수 있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며칠 뒤 기부하겠다는 전화가 왔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운보 화백 자신이 직접 청송교도소로 그림을 가지고 가겠다는 것이었다.


유명한 화가들이 기부한 그림을 기념하는 행사는 재소자들 수백 명이 도열한 청송교도소 앞마당에서 열렸다. 간단한 식순에 맞춰 삼중스님이 <금강경> 법문을 끝내고 자리에 돌아오자 옆에 앉은 운보가 ‘나또 하마띠 타고 시타(나도 한마디 하고 싶다)’ 고 청했다. 행사 식순에 없던 갑작스런 그의 제안이었지만 삼중스님은 그의 손을 잡고 연단에 올라갔다.

그런데 운보의 입에서 터져 나온 첫 마디가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 “벼씨 새끼트라!(병신 새끼들아!)”

1981년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 설립된 청송교도소는 ‘빠삐용 요새’라는 별칭처럼 고질적인 전과자나 흉악한 범죄자나 억울하게 잡혀 온 시국사범들이 섞여 있어서 그들이 뿜어 내는 드센 기운에 보통 사람들은 잔뜩 겁을 먹고 주눅이 드는 곳이었다. 이런 사람들 앞에서 운보는 오히려 호통을 쳐가면서 강연을 이어나갔다.

병신은 나다. 내가 벙어리이니 내가 병신 머저리다. 그렇지만 나는 몸은 병신이지만 정신만은 건강하다. 그런데 당신들은 몸은 건강하나 정신은 병신이다. 그래서 내가 욕을 한 것이다. 나는 몸이 병신이지만 뼈를 깎는 노력으로 성공한 화가가 되었다.

나는 타고난 재주나 조건을 믿지 않았다. 내 재주를 갈고 닦아서 성실하게 열심히 노력했다. 그래서 성공했다. 왜 건강한 몸으로 이런 무시무시한 교도소에 들어와서 이 지옥에서 죽을 고생들을 하느냐?

그런데 이상하게도 모두들 고개를 숙이더니 숙연하게 듣고 있는 게 아닌가? 알아 듣기 쉽지 않았지만 피 토하듯 터져 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는 재소자, 교도관, 그리고 행사에 참가한 사람들 모두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행사를 끝낸 후 운보 화백은 자신과 같은 처지인 벙어리 재소자를 만나 보겠다고 우겨서 청각장애 재소자의 감방에 들어가게 되었다. 감방 안에 들어 선 운보 화백은 벙어리 재소자를 꽉 껴안더니 볼을 비비면서 울었다.

‘병신된 것도 서러운데 왜 이런 생지옥에서 이리 서럽게 살고 있느냐?’ 울음 속에 전혀 알아듣지도 못할 말들을 서로 주고받았다. 볼을 서로 비비면서 우는 통에 삼중 스님의 눈에서도 눈물이 저절로 나왔다. 통곡으로 변해 서로 엉켜진 몸 타래를 풀어내는데 한참 걸렸다.

말보다 뜨거운 가슴과 몸으로 진실을 전달했던 운보 화백...그가 청송교도소 앞마당에서 내지른 ‘벼씨 새끼트라!’라는 호통소리가 그리워진다. 이 혼란스러운 시대에 갇혀서 살고 있는 우리들을 보면 그는 뭐라고 호통을 내지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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