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플랫폼뉴스는 SNS(사회적관계망)에서 관심있게 회자되는 글을 실시간으로 전합니다. '레거시(legacy·유산)적인 기존 매체'에서는 시도하기를 머뭇하지만, 요즘은 신문 기사와 일반 글의 영역도 점점 허물어지는 경향입니다. 이 또한 정보로 여겨주시면 고맙겠습니다. SNS를 좌판에서 한글 모드로 치면 '눈'입니다. 엄선해 싣겠습니다.
<성독(聲讀-글읽기)>
눈과 귀가 성한 사람은 이 글의 주제(글 읽기)에 무슨 관심을 가지랴. 그런데 아니다.
언어(말)와 문자는 인간을 탐구하는데 출발점이지 않은가.
문자를 읽는 문자읽기, 즉 읽기에 대해 얘기해본다. 글이 있기에 읽기를 시도할 수 있다.
또한 글을 기반으로 한 말하기와 읽기는 소리란 매개로 말하고 읽어 소통하는 공통점이 있지만 둘은 다르다.
우선 글(문자)과 말하기부터 살펴보자.
글(문자)이 있기 전에는 말하기만 있었다. 말하기는 때로 읊기 또는 읊조리기, 아니면 외치기 또는 속삭이기라고 할 수 있다.
인류는 오랫동안 말로 하는 언어를 사용해왔다. 책을 가진 뒤에도 오랫동안 말로 책을 읽었다. 눈으로 읽지만 않았다는 말이다.
다음은 읽기와 말하기다.
글이 생긴 이후에도 한동안 읽기가 아니라 말하기가 계속됐다. 문자가 모든 사람에게 사용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글을 배우지 못한 층이 많았다.
이런 여건으로 필사문화 시기에 들어섰어도 여전히 구술문화는 유지되었고, 성독이 일반적이었다.
기원후 4세기의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아(Saint Ambrose)는 글보다는 듣는 것을 믿는다고 기록하였으니까.
로마의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기원전 106~기원전 43년)는 원로원에서 장광설을 구사하면서 원고를 보지 않고 말을 했다. 그의 말을 누군가가 받아쓰고 나중에 글로 남겼다.
당시엔 글이 아닌 말의 시대가 지배했음을 알 수 있다. 옛날 유럽에는 조직이나 사회, 또는 왕국의 대표라고 해도 글(문자)을 모르는 자들이 꽤 있었다. 누가 감히 이들 앞에서 쓴 글을 읽었겠는가?
당시 글(문자) 쓰기와 읽기는 어쩌면 기능인의 역할이라고 여겨졌을 것이다.
따라서 글(문자)을 모른다고 부끄러워 할 이유가 없었던 것 같다. 오히려 말하기가 우위로, 당연한 소통 방법으로 여겨졌던 것 같다.
물론 편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편지를 보내도 글(문자)을 모르는 귀족들은 종(노예)을 통해 편지를 주고받았다. 비밀이 새 나가면 어쩌지 하는 우려가 있었지만 걱정을 안 했다. 종은 글을 더 모르니까. 당시에는 종을 (문화적) 의식을 가진 인간으로 여기지 않았다.
프랑크 왕국의 카알 대제도 글을 몰랐다고 한다.
'황야설수야설(黃也說竪也說)의 작은 인문(人文)카페(65)'에는 카알 대제가 라틴문자 정비에 공을 세운 일을 다루고 있다. 이 기록을 보면 서구(유럽)는 12세기에야 책을 진정 소리내지 않고 읽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술문화는 한참 후인 18세기까지도 지속됐다.
띄어쓰기 등도 알아보자.
그리스·로마인의 이어쓰기인 '스크립티오 콘티누아'는 대문자로 쓰여졌고 단어 사이의 띄어쓰기와 글자 사이의 어떤 표시(쉼표, 마침표, 물음표, 느낌표 등)도 쓰지 않았다.
이것은 중세까지도 이어졌다. 기원전 13세기까지 그리스문자와 로마문자가 그랬다.
이어쓴다는 것은 말의 지배를 상징하는 것이기에 이를 버리는 것은 바로 코덱스 자체의 혁신을 뜻하다. 코덱스(codex)란 오래 전 서양에서 책을 만들던 방식으로 나무나 얇은 금속판을 끈이나 금속으로 묶어 제본했다.
코덱스를 계기로 문자 문화는 급변한다. 인쇄 기반의 문자성에 대한 지지였다.
중세까지의 알파벳 문장은 이어쓰기인 '스크립티오 콘티누아'였지만 오늘날은 대체로 여백을 두고 표기한다.
성독(聲讀)에 이은 묵독(默讀)의 역사는 꽤 늦은 역사 사건이다.
12세기에 이르러서야 묵독이 진정한 읽기로 받아들여졌다. 그 이전 그리스·로마 사람들에게는 소리를 내 글을 읽는 게 당연했다. 글읽기에 귀찮은 귀족은 노예를 사서 글을 읽히고, 자신은 듣기만 했다.
그런데 12세기에 들면서 묵독으로 문화의 변모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책 미디어가 실질적 문화적 충격을 주기 시작하는 것은 어쩌면 책 자체의 등장이 아니라,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라는 이미지의 전환 이후부터일 것이다.
띄어쓰기 등도 알아보자.
그리스·로마인의 이어쓰기인 '스크립티오 콘티누아'는 대문자로 쓰여졌고 단어 사이의 띄어쓰기와 글자 사이의 어떤 표시(쉼표, 마침표, 물음표, 느낌표 등)도 쓰지 않았다.
이것은 중세까지도 이어졌다. 기원전 13세기까지 그리스문자와 로마문자가 그랬다.
이어쓴다는 것은 말의 지배를 상징하는 것이기에 이를 버리는 것은 바로 코덱스 자체의 혁신을 뜻하다. 코덱스(codex)란 오래 전 서양에서 책을 만들던 방식으로 나무나 얇은 금속판을 끈이나 금속으로 묶어 제본했다.
코덱스를 계기로 문자 문화는 급변한다. 인쇄 기반의 문자성에 대한 지지였다.
중세까지의 알파벳 문장은 이어쓰기인 '스크립티오 콘티누아'였지만 오늘날은 대체로 여백을 두고 표기한다.
※ 윗글은 말과 글을 매개로 말하기와 읽기, 보기의 변천사를 단편적으로 쓴 것입니다.
십수년 전에 국내 굴지의 통신업체 직원이 뜬금없이 '읽어주는 신문'을 만들면 좋겠다는 제안을 하더군요. 아이디어란 게 그렇듯 솔깃했습니다.
QR코드처럼 음성 종이코드를 신문의 사설이나 칼럼 옆에 붙이면 '듣는 신문'이 된다는 말이었습니다. 신문업이 갈 길임은 맞는 것 같은데도 와닿지 않았던 게 먼 미래의 기술이란 생각이 들었고, 신문 글의 '읽는 맛'의 잃음이 아쉽게 다가왔습니다. 그렇게 되면 신문이 되는 종이의 가격도 오를 거고, 신문 기사를 읽어주는 대체 기술과 첨단 기기들도 나올 것이란 생각이었습니다.
이렇듯 관습과 개인의 습관은 변화의 지점마다 저항 의식을 갖게 하는 등 매우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이 글을 읽는 동안 그동안 잊고 있던 기억을 불러냈습니다.
요즘 읽어주는 기사는 이미 많이 나왔습니다. 종이신문에 붙인 것이 아닌 온라인 상에서입니다. 방송국 아나운서들은 시 낭독과 같은 바른 글 낭독 이벤트도 자주 합니다.
띄어쓰기에 권위가 깃들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가끔 기사에 붙은 댓글을 보면 띄어쓰기를 하지 않고 장문을 쓴 분들이 있습니다. 따닥따닥 붙여써 이해하기가 참 힘듭니다. 이런 분들의 글이 대체로 깁니다. 윗글을 읽어 보니 서양의 중세 때는 권위를 내세운다고 다닥다닥 붙여썼네요. 남이 이해하기 힘들게 한다고 그랬을까요?
앞으로 이들 영역은 어떻게 진행될까요. 시대에 따른 말과 글의 효용성 다툼. '글 잘쓰는 사람'과 말 '잘하는 사람'의 영역 경쟁입니다. 오래 전 경향신문과 MBC가 법인 분리 때 능력 있던 기자들이 방송으로 가지 않았다고 하지요. 지금은 영상매체 시장이 성장하면서 글보다 말이 일반인에게 더 와닿는 듯합니다.
보통 말을 잘하면 달변, 글을 잘쓰면 고매함을 말합니다. 두개를 한꺼번에 하는 교육을 했으면 합니다. 눈으로 보며 읽어 가면 더 명확히 머리 속에 들어옵니다. 국어수업 시간에 책을 읽게 하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벌써 젊은층에는 보는 것도, 쓰는 것도 싫고 읽어만 주는 걸 좋아하는 베짱이들이 많아지고 있답니다. [플랫폼뉴스 정기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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