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아연의 동행 15] 4월이 잔인한 달이 아닌 이유

신아연 승인 2019.04.22 07:49 의견 0

 [플랫폼뉴스 신아연 칼럼니스트] 

                  인문예술문화공간 블루더스트 공동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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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4월생이지만 주변에 4월생이 유난히 많은 것 같다. 현란히 피어오르는 꽃들, 뒤를 이어 바쁘게 돋아다는 잎들조차 따지고 보면 4월생이다. 자연은 4월에 생명을 주었다. 동시에 많은 생명을 거둬들였다. 4월은 생명의 오고감이 선명히 대비되는 계절이다. 삶이 충만할수록 죽음을 생각하게 되는 때이다.


지천에 아름답게 피어나는 꽃들은 실상 죽음의 세계에서 왔다. T.S. 엘리엇이 시 <황무지>에서 말하듯,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워냈다는 것은 삶이 죽음에 빚을 졌다는 뜻이며, 언젠가는 죽음이 삶에게서 그 빚을 받아낸다. 이 세상에서 태어남은 저 세상에서는 죽음이다. 이 세상의 죽음은 저 세상의 태어남이다. 만약 두 세상이 있다면.


교차로를 오가는 수많은 차량처럼 삶과 죽음은 동시에 오고간다. 손등과 손바닥을 분리할 수 없는 것처럼 삶은 애초에 죽음과 함께 왔고, 삶과 죽음은 한 존재의 다른 형태이다. 손등이 삶이고 손바닥이 죽음이라면 손을 뒤집는 순간 삶은 죽음으로 모습을 바꾼다. 손은 손등과 손바닥을 함께 이르는 말이지 않나.  

 

장자는 구름이 생겼다 사라지고 그 모양이 이리저리 달라지는 것처럼 삶과 죽음도 그와 같다고 말한다. 기가 뭉치면 삶이라고 하고 뭉쳤던 기가 흩어지면 죽음이라고 보았다. 즉, 형태나 형체만 다를 뿐 총량이나 본질은 같다는 말이다.

그러니 4월을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할 것도 없다. 그것은 삶과 죽음에 차이가 없다는 것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죽음은 삶의 시작이다. 삶은 죽음을 바탕으로 한다. 궁극적으로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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