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상·제사상 차림, 같다? 다르다?

추석은 제사와 달리 음식 나눠먹는 명절
차례상은 송편 과일 한두개면 충분
유교에선 돌아가신 날만 기제사 지내

정기홍 승인 2020.09.30 09:12 | 최종 수정 2021.12.30 22:33 의견 0

정세균 국무총리가 최근 “조선왕조실록 등 여러 사료를 확인해 보면 과거 우리 선조들도 홍역이나 천연두와 같은 역병이 돌 때면 명절 차례를 지내지 않았다고 한다”며 "우리도 지혜를 발휘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다. 추석연휴 고향방문 자제를 요청하며 한 말이다.

위정자(爲政者)로서 얼마나 다급했으면 전통적인 민속 분위기마저 '깨는' 언급을 했을까 싶다.

명절 예법(禮法)의 개념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달라져 왔다. 지금의 명절 예법에도 차이와 오해들이 엄연히 존재한다.

▲ 옛날 차례 지내는 모습.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많이 헷갈리는 것은 조상의 기일(忌日·제삿날)에 예를 갖추는 제사(祭祀)와 추석·설 명절에 예를 갖추는 차례(茶禮)를 대별하는 것이다. 둘다 중국 송나라의 유학자 주희의 '가례'를 기본으로 삼는다.

먼저 사전적 의미부터 살펴보자. 제사는 신령에게 음식을 바치며 기원을 하거나 돌아가신 이를 추모하는 의식이다. 차례도 조상의 음덕을 기리는 것은 같지만 음력 매달 초하룻날과 보름날, 단오날, 명절, 조상 생신날 등에 간단히 차와 다과를 올리는 예식이다. 일반적으로 절사(節祀)라고 하고 영호남에서는 차사()라고 한다. 현대적으로 풀이하면 제사는 기념하는 것이고, 차례는 음식을 올린다는 뜻이 아닐까.

유교가 등에서의 주장과 설에 따르면, 유교에는 조상이 돌아가신 기일에 지내는 기제사만 있을뿐 명절 때의 제사는 없다고 한다. 명절때 가족이 모이면 음식을 만들어 나눠먹는데 후손들만 먹는 것이 죄송스러워 조상께 먼저 올리는 차례만 있을 뿐이란 주장이다. 차와 과일 등을 간단히 올린다. 이래서 차례는 제사와 달리 규모도 크지 않았다.

또 자료로 전해지는 풍습 등을 참조하면, 매달 보름에 조상께 차를 올리고 사당에 참배했던 중국의 풍습이 전래했단 설이 있다. 양국 간의 문화 교류에 의한 전파였고 이것이 우리에게 전통 미풍양속으로 이어져 내려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더 설득력을 갖는 것은 제사의 경우 조선시대에 유교 의식이 가미돼 시작됐다는 주장이다.

그러면 상을 차리는 격식은 완벽히 정해져 있는 것일까? 고장마다, 가문마다 지내는 제사나 차례 의식의 차는 어느 정도일까?

제사상이나 차례상 차리는 법은 지금에도 통용되는 격식이 있다.

조율이시(棗栗梨柿·대추 밤 배 감 순서), 홍동백서(紅東白西·붉은것은 동쪽, 흰것은 서쪽에 놓음), 어동육서(魚東肉西·생선은 동쪽, 고기는 서쪽), 두동미서(頭東尾西·생선 머리는 동편, 꼬리는 서편으로 향함),

좌포우혜(左脯右醯· 왼쪽은 말린 고기, 오른쪽은 식혜) 등이 그것이다. 윤선도 등 조선의 유학자들이 홍동백서 등을 주장해 정착됐다는 주장이 전해진다.

속설이 흥미롭다. 대추(棗·조)는 씨가 하나이므로 임금을, 밤(栗·율)은 한 송이에 3톨이 들어 있어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의 3정승(政丞)을, 배(梨·이)는 씨가 6개 있어 6조판서(六曹判書·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 판서)를, 감(柿·시)은 씨가 8개로 조선 8도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전주 이씨 가문이 이자가 들어간 배를 감보다 앞세웠다는 우스개도 있다.

하지만 가가례(家家禮)라 하여 집안마다 내려오는 전통 격식이 다르다. 제사나 차례는 물론 장례 격식도 마찬가지다. 요즘 들어서는 고인이 생전에 즐겨찾던 음식을 차려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경상 동해안에서는 고래고기가 올라가고, 피자도 올려도 되냐고 묻는 것이 이런 이유들이다.

그렇다면 단순했던 차례상이 제사상 수준으로 복잡해진 이유는 무엇일까? 양반사회였던 조선 후기에 너도나도 있는 척, 양반 행세를 하면서 부를 자랑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긴 것이란 해석이 설득을 더한다. 임진왜란 이후 양반 족보를 산 천민들이 경쟁적으로 양반집 제사상 흉내를 내면서 여염가에 퍼졌다는 주장이다. 옛날 있는 집 사람들은 집안 행사를 잘 치러내는 것이 본인의 정체성과 자존감 확인하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믿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여인들의 고충이 심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따라서 추석 차례상은 송편과 제철 햇과일 1, 2개 종류면 충분하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차례상에서 조율이시나 홍동백서를 따지는 건 예법의 과도한 해석이란 말이다. 실제로 오랜 사진을 보면, 없이 살때임을 감안해도 차례상이 아주 간편하다. 지금의 차례상 방식은 60년대 이후 생활이 다소 나아지면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중국 유가 경전인 예기(禮記) 등에도 ‘과(果)’라고만 적혀 있을뿐 종류나 순서의 언급이 없다고 한다.

모든 유교 명문가에서 제사와 차례를 성대히 지낼 것이란 것도 오해다. 조선의 대표 성리학자인 명재 윤증, 퇴계 이황 등 여러 종가에는 ‘제사상을 간소하게 차리라’는 지침이 전해 내려온다. 명재 종가는 제사상 크기가 가로 99cm, 세로 68cm로 정해져 작은 밥상에 음식을 많이 올릴 수도 없다. ‘부녀자들의 수고가 크고 사치스러운 유밀과(약과)는 올리지 말라. 기름을 쓰는 전도 올리지 말라’ 등의 지침도 있다. 제사에서 두 번째 술잔은 반드시 맏며느리가 올리도록 해 여성의 수고와 권위를 인정하는 종가도 있다.

또한 선조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유연하고 현실에 맞게 예법을 해석했다. 형제간에 돌아가며 제사를 지내는 ‘윤회봉사’, 형제가 제사 음식을 각자 준비해 오는 ‘분할봉사’, 사위가 장인 장모의 제사를 지내거나 딸과 외손이 제사를 잇는 ‘외손봉사’ 등이 그 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관계자는 “전통은 시대와 집안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며 “모든 의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라고 강조했다.

추석 명절에는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오순도순 송편도 만들고 보름달도 보며 즐겁게 지내다가 헤어지는 것이 최고다. 하지만 이것도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얘기요, 물질 문명이 득세하는 요즘엔 앉으면 금전 이해관계로 언성을 높이다 헤어지는 경우를 다반사로 본다.

제사 문화는 고대로부터 이어진 것이고 선사시대 이후 인류의 공통된 문화이다. 현대에는 이런 전통적 의미가 퇴색되고 축소해지는 흐름임은 분명해 보인다. 최근 농촌진흥청의 온라인 설문조사에 따르면 올 추석 차례는 10명 중 4.5명만 지낼 것으로 집계됐다. 코로나19 영향도 있지만 추석의 본래 의미도 퇴색되면서 현대적으로 바뀌어가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조상 덕을 본 사람은 여행 다니고, 조상복 없는 사람들만 모여서 지지고 복고 다투는 날'이란 자조적인 말이 나오지 않아야 한다. 또 한 자녀 집안이 일상화 돼 며느리를 종일 시댁에 잡아둘 이유도 없다. 한해 한번이든, 오전 오후든, 방문 날짜를 정하든 서로 번갈아 양가를 방문하면서 명절을 지내면 더 좋을 듯하다. 예()는 정()에서 우러나와야 하는 게 마땅하고, 성의가 더 중요한 것이다.

■ 차례상 차림은 어떻게?
국립민속박물관에 따르면 차례상은 지역이나 가문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5열로 음식을 차린다.

상의 가장 안쪽인 1열에는 밥 잔 국과 시접(제상에 수저를 담아 놓는 놋그릇)을 놓는다. 2열에는 국수 육전 적 어전 떡 등을 두는데 어동육서(생선은 동쪽, 고기는 서쪽) 두동미서(생선의 머리는 동쪽, 꼬리는 서쪽)의 원칙이 있다.

3열에는 육탕 소탕 어탕 등 탕류를 놓는다. 4열은 포 나물 간장 김치 식혜 등을 두는데 좌포우혜(포는 왼편, 식혜는 오른편)를 따른다. 5열은 대추 밤 배 감 사과 한과 등을 놓는다. 조율이시(대추 밤 배 감 순), 홍동백서(붉은 과일은 동쪽, 하얀 과일은 서쪽) 등의 원칙이 있다.

다만 차례상에는 조기처럼 '기'나 '어'로 끝나는 생선은 올리고 삼치 갈치 꽁치 등 끝에 '치'자가 든 것은 올리지 않는다고 한다. 또 붉은 팥 대신 흰 고물을 쓴다고 한다. [플랫폼뉴스 정기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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