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드의 솔직함

조용수 승인 2018.01.05 10:04 | 최종 수정 2021.11.04 13:28 의견 0

누드(nude)와 알몸(naked)은 사전적 개념이 다르다.
알몸은 그냥 단순히 옷을 벗어버린 상태를 말하지만
누드는 여기에 예술개념이 접목돼야 한다.

누드의 솔직함

[플랫폼뉴스 조용수 기자] 언제부터 인간들이 옷이라는 두 번째 피부를 만들고 입었을까? 구약성서 창세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어 동방의 에덴에 동산에 아담과 하와를 만들어 살게 했으나, 하와는 금단의 열매인 선악과를 따먹은 후 전에는 알지 못하던 벌거벗은 몸을 알고, 부끄러움을 알게 되었으며, 그래서 나뭇잎으로 몸을 가렸다고’ 이처럼 인간들은 벌거벗은 몸이 부끄러워 옷을 입었다고 한다.

다른 짐승들처럼 추위와 더위를 이길 수 있는 털이나 단단한 가죽이 없는 인간이기에 그렇겠지만 오늘은 그냥 누드에만 포커스를 맞추자.

벌거벗은 몸이 부끄러워

이런 성경의 기록을 빌리지 않아도 남자에게 여자의 벗은 몸, 여자에게 남자의 벗은 몸은 언제나 신선한 충격(?)이고, 아름답고 매력적인 ‘작품’인 것이다. 물론 이런 감정은 선악과를 먹기 전 최초의 인간들이 가졌던 절대순수의 감정이 있어야 하겠지만. 어쨌든 자신의 가장 내밀한 곳과 부족한 부분, 그리고 자신의 자랑스러운 부분, 꾸미지 않는 원시 그 자체, 인공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는 전라, 그리고 그것을 내보이는 솔직함과 순수의 의미에서 벌거벗은 몸은 부끄럽기에 아름답고, 꾸미지 않았기에 당당한 것이다.

‘네이키드’(naked)가 알몸이 된 자연스러운 상태라면 ‘누드’(nude)는 관람자의 시선을 전제로 발가벗겨진 상태를 의미한다. 이렇게 벗겨진 인간의 모습은 이미 옛날부터 미적인 호기심을 일으켜 조각이나 미술, 문학, 그리고 현대에 와서는 사진으로 재창조 되었으며, 또 언제나 에로티시즘(eroticism)의 단초가 되고 원인이 되었다. 이렇게 에로티시즘은 우리의 삶이고, 문화다. 그래서 모든 삶은 더욱 에로틱해져야 한다. 허위의식으로 가득 찬 근엄함, 엄숙함에서 탈출해야 한다.

성의 미학
요즘 벌거벗은 알몸으로 생활하거나 그런 일을 바람직한 것으로 보는 누드주의와, 누드도 패션의 일부라는 패션누드가 유행이다.

연세대 마광수교수는 “위선은 솔직하지 못한데서 나오고 솔직하지 못한 것은 도덕적 테러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온다. 자유가 좋다면 그것으로 끝내야지 곡 '방종'과 대비시킬 필요는 없지 않은가. 성이 즐거운 것이라면 그것으로 끝내야지 '퇴폐'나 음란을 꼭 동반시켜 자신의 성적 욕구를 구구히 변명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라고 이야기했다.

이 말에 100% 동의는 하지 않지만 일부분은 동감이 간다. 하도 탈이 많은 사람의 말이라 조심은 되지만, 위선은 솔직하지 못한데서 나온다는 구절은 맞는 말이다.

이야기가 옆으로 샜다. 아무튼 누드의 진정성에는 반드시 예술적 개념으로 접목되어야 건강하다. 그리고 누두는 서로를 추구하면서 사랑이라는 상태에 빠진다. 그것은 눈길의 마주침에서 오는 놀라움과 부끄러움, 또한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냄과, 또 자신의 모든 것을 숨기지 않음으로 서로에게 신뢰를 주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성의 미학이라고 부른다.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불가능한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 되는 유일한 방법, 인간적으로는 가장 순수하게 합일하는 길, 바로 그것이 성(性)이다. 이보다 더 아름답고, 승화된 사랑은 없다. 그래서 성과 사랑은 인간에게 있어 인간이 풀어야 하는 가장 원초적인 문제로 우리들의 삶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어느 학자는 “누드(nude)와 알몸(naked)은 사전적 개념이 다르다. 알몸은 그냥 단순히 옷을 벗어버린 상태를 말하지만 누드는 여기에 예술개념이 접목돼야 한다”고 했다.

이런 시각에서 요즘 눈살 찌푸리게 하는 사건이 있다. 바로 학위를 도용한 신모 여인의 사건이다.

그런데 언론은 그를 이상하게 만들어 버렸다. 바로 누드(nude)와 알몸(naked)의 차이를 구별 못한 것이다. 그 신문은 독자의 알권리를 위해 신모여인의 알몸을 공개했다고 변명하지만 그 어떤 독자도 그런 알권리는 주장하지 않는다. 정말 추잡하기만 하다.

어쨌든 인간의 벗은 몸이 예술 소재의 중심에 있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인간들은 처음 누드를 관능, 힘, 아름다움으로 표현했으며, 현대에 오면서 페미니즘, 동성애와 같은 사회적 담론을 표현하는 상징적인 기호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여전히 누드는 아름다움과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표현으로 이어지고 있다.

끝으로 지금 우리나라가 군주국가가 아니어서 다행(?)스럽게 밝히는 사실은, 11살에 일본에 건너가 30년 가까이 볼모생활을 했던 비운의 조선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은 누드 그림에 심취했다고 한다.

그는 또 일본 아카사카의 자택 근처에 있는 고급 요정에서 일본 기생들을 모델로 그린 작품들이 1990년대 언론에 일부 공개됐었다. 그래서 하는 말이지만 누드는 누구나 즐긴다는 사실이다.

특히 수컷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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