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 찾는 사람이 많이 늘었다. 맛이 있어 늘었다. 10여년전만 해도 음식점에서 막걸리통을 보기 힘들었지만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지금은 '향수술'도 '아재(아저씨)술'도, 더더욱 들일을 하다 한사발 꿀꺽꿀꺽 마시던 '노동주'도 아니다.
이 같은 분위기는 무엇보다 술의 품질이 좋아져 마시기 좋은 술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고급화 전략으로 원료, 제조 방식, 숙성 기간 등을 다양화하면서 맛을 향상시키고 있다. 맛과 향은 물론이고 병 모양과 라벨 등에 감각적인 디자인을 입혀 막걸리에 대한 과거 인식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시장의 변화로 젊은 MZ세대(밀레니얼+Z세대, 1980년대 초반~2000년대 초반 출생)에서 막걸리를 찾는 이가 많아졌다. 이에 맞춰 포장용기 교체부터 탄산감 강조 등 제품도 다양화해졌다. 코로나19 사태 이후엔 정기적으로 배달해주는 ‘온라인 구독 서비스’ ‘당일 배송 서비스’ 등도 선보이기 시작했다.
막걸리 수요가 늘면서 요즘은 지역 양조장을 찾아 막걸리를 맛보는 ‘양조장 투어’도 많아졌다.
이 추세는 막걸리 시장의 덩치를 키우고 있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와 전통주 업계에 따르면 2012∼2016년 막걸리 소매시장 규모는 3000억 원 정도. 이어 규제가 풀리기 시작한 2017년에는 3500억 원대로 늘어났고, 2018년에는 4000억 원대에 진입했다. 지금은 4500억 원대를 훨씬 넘어섰다는 분석이다. 10여년 전 매출 20억원대의 지역 양조장이 300억원대로 전국구가 된 사례도 있다.
시장이 막걸리에 반응하자 소규모 양조장이 주도하던 시장의 변화에 대형 업체도 참여했다. 젊은 고객 확보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하지만 고유의 맛을 잃지 않으면서도 유통기한을 늘리는 기술 부족으로 아직 유통시장에선 다른 주류에 밀린다. 음식점들도 하루에 한두번씩 가까운 편의점에서 구입해 손님에게 내놓는 실정이다.
▶ '청년 양조인' 막걸리 스타트업 붐
청년 양조인들이 막걸리 시장의 변화를 이끌고 있다. 이들은 2000년대 중반부터 한국전통주연구소, 한국가양주연구소, 막걸리학교 등에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다. 2030대 젊은 수료자들이 막걸리 시장에 뛰어들면서 창업 열기가 뜨거워졌다.
이들은 인공 감미료를 사용하지 않고 질 좋은 원료를 사용하면서 승부를 걸고 있다. 유통기한이 짧은 막걸리의 태생적 한계 극복에도 힘쏟고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활용한 마케팅 능력도 이들의 무기다.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을 통한다. 주류 업계 관계자는 “정보기기(IT) 활용에 능한 청년 양조인들은 기존 유통 채널을 깨고 다양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30대 중반인 고성용 대표 등 4명이 지난 2018년 창업한 서울 성동구 성수동의 ‘한강주조’는 대표적인 막걸리 스타트업이다. ‘한국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나루’가 되겠다는 의욕으로 창업을 했다. 소규모였지만 차별화된 맛과 라벨, 디자인을 앞세워 시장의 다크호스로 떠올랐다. 서울 강서의 경복궁쌀 등으로 빚은 무감미료 막걸리로 서울의 지역특산주다.
일반 막걸리보다 쌀 함유량을 두 배로 넣은 ‘나루 생막걸리’의 반응이 좋은 편이다. 인공 감미료도 넣지 않는다. 이런 제조방식이 알려지면서 전통 주점뿐 아니라 한식당, 퓨전레스토랑 등 다양한 형태의 업장에서 납품 문의가 들어온다.
인공 감미료를 넗지않고 쌀 함유량을 높인 '청년 막걸리'는 한강주조 말고도 ▲ 서울 구수동의 구름아양조장 ▲ 서울 논현동의 C막걸리 등이 있다. 최근 양조장은 서울 등 도시에서 소규모로 운영되는 경향을 띤다.
전남 곡성의 ‘시향가’를 빚어내는 농업회사법인시향가의 양숙희 대표(여)도 30대 후반의 유망 젊은 양조인이다.
시향가는 ‘향기를 베푸는 집’이라는 뜻을 가졌다.
이곳의 대표 막걸리인 '토란 막걸리'는 곡성 특산물인 토란과 친환경 쌀로 만든다. 토란을 칩 상태로 건조해 고두밥과 함께 15일간 숙성시킨다. 생막걸리임에도 냉장 보관 유통도 30일로 긴 편이다. 유통기간의 단점을 커버하면서 백화점 등 대형 유통업체에도 입점하기 시작했다.
|
▲ 시향가 막걸리. 토란과 쌀로 만들고 유통기한이 길다. |
천비향의 '택이 막걸리'는 생산 지역인 평택의 '택'에서 이름을 따왔다. 청년 양조인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김담희 팀장이 어머니 이예령 대표와 함께 술을 빚고 마케팅에도 적극적이다.
▶ 고급화는 이미 진행 중
막걸리의 고급화는 시장 변화의 큰 축이다. 다양한 제조 방식이 자연스럽게 막걸리의 고급화를 이끌었다. 친환경 쌀, 전통 누룩, 천연 암반수, 지역 특산물 등을 원료로 하면서 가격이 높아졌고, 그 가치를 소비자가 인정하는 분위기다.
프리미엄 막걸리가 많아지는 것은 소규모 양조장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대규모 시설을 갖춘 곳에서는 수지가 맞지 않아 수제로 만들기 힘들다. 소규모 양조장은 대중성보다 희소성에 주목하는 MZ세대를 겨냥해 다소 비싸지만 한정판 상품을 선보인다.
최근 한 병에 1만 원이 넘는 ‘프리미엄 막걸리’의 입소문도 잦아졌다. 전남 해남에 있는 해창주조장이 출시한 ‘롤스로이스 막걸리’는 1병에 11만 원으로 가격을 책정하면서 이슈 먹걸리로 떠올랐다. 상품 가치 논란은 있지만 막걸리도 비싸고 고급술로 말할 수 있다는 긍정 신호를 보냈다는 평가도 한다.
|
▲ 롤스로이스 막걸리. 가격이 한병에 11만원으로 알려져 유명세를 타고 있다. |
울산 양조장에서 빚는 ‘복순도가’는 고급 막걸리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약간 비싼 막걸리의 대중화를 이끌고 있다. 복순도가의 '손막걸리'는 한해 10만 병 이상 팔리는 대표 프리미엄 막걸리로 자리 잡았다.
여기서 만드는 손막걸리의 소비자가는 한 병에 1만 2000원이지만 막걸리계의 ‘샴페인’으로 불리며 인기다. 일반 막걸리보다 탄산이 풍부하다. 풍부한 탄산감은 제조법의 차이에서 나왔다.
|
▲ 복순도가의 손막걸리. 톡 쏘는 맛에 삼페인 이름이 붙었다. |
숨구멍을 없애고 술을 밀봉해 공기 접촉을 차단한 것이 이 같은 술맛을 지속시키는 효과를 낳았다.최소 한 달 간 쌀을 항아리에서 발효시켜 사과 등 과일 향을 담아낸 것이 샴페인과 비슷하다.
막걸리 업계 관계자는 “일률적인 맛을 내는 인공배양 효모가 아닌 천연효모를 사용해 맛과 향에서 다채로움을 추구한 것이 시장의 호응을 이끌고 있다”며 “숙성 시간을 고려하면 발효에서 출고까지 적게는 30일, 많게는 150일까지 시간이 걸리는데 소비자들이 기꺼이 비용을 지불하기 시작했다”고 진단했다.
▶ 대형 유통업체도 합류
소비층으로 떠오른 MZ세대를 잡기 위해 유통 업체도 막걸리 제조업체와 손을 잡고 있다.
이마트의 ‘지평이랑이랑’은 이마트와 경기도 양평의 지평주조와 손잡고 지난 7월 출시한 탄산감을 극대화한 스파클링 막걸리다. 기존 막걸리보다 가볍게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MZ세대를 사로잡았다. 지평이랑이랑을 출시한 이후 12월 초까지 이마트 막걸리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21.8% 성장했다.
▶ 막걸리 맛 보는 외국인들
젊은 세대뿐 아니라 외국인도 막걸리에 빠졌다. 최근 미국의 유명 요리 유튜버인 ‘아담 라구시아’는 자신의 채널에서 막걸리를 소개했다. 그는 막걸리를 직접 만들어 마시며 막걸리 역사를 설명하기도 했다.
서울 장수막걸리는 올 3분기까지 수출 실적이 전년 동기보다 12% 늘었다. 지난 7월 출시한 신제품 ‘장홍삼 막걸리’는 외국인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알코올 도수를 4도로 낮췄다.
국순당도 올 9월까지 해외에서 매출 406만달러(44억원)를 찍으며 전년 동기 대비 12.8% 성장했다.
▶ 지역 특산 막걸리도 건재
지역의 원재료를 활용해 고유의 제조방식으로 빚는 ‘지역 특산 막걸리’는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여행객들은 그 지방에 가면 꼭 먹어봐야 하는 음식들로 인식한다.
파전에다 마시는 부산의 '금정산성 막걸리'는 금정산성마을에서 만든 전통 누룩과 암반수를 사용해 빚는다. 그만큼 맛과 향이 특별하다.
|
▲ 부산 금정산성 막걸리. |
비슷한 특산 막걸리는 충남 논산의 ‘우렁이쌀 손막걸리’, 충남 공주 ‘왕알밤 막걸리’, 전남 장성 ‘여수밤바다 막걸리’, 전남 ‘산소막걸리’ 등 많다. 이미 잘 알려져 있지만 최근의 막걸리 인기에 점차 인지도를 쌓아가고 있다.
▶ 서울 시장 놓고 겨룬다
서울 업체인 서울 장수는 올 1월 대표 제품인 ‘장수 생막걸리’의 포장을 25년만에 녹색 페트병에서 재활용이 쉬운 투명 페트병으로 바꿨다.
|
▲ 서울 장수막걸리. 서울 시장을 독보적으로 점유한다. |
재활용 등 환경 보호 영향 때문이지만 포장이 산뜻해졌고, MZ세대에게도 어필하고 있다.
경기도 양평 ‘지평막걸리’로 유명한 지평주조는 올 7월 이마트와 손잡고 청량감을 강조한 신제품 ‘지평 이랑이랑’을 출시했다. 일반 막걸리보다 탄산감을 강화한 스파클링 막걸리다.
|
▲ 양평 지평막걸리. 긴 유통기한으로 장수막걸리 시장을 파고 들고 있다. |
가격을 일반 막걸리의 3배가 넘는 한 병에 4800원이라는 가격이 책정됐지만 출시 후 10월까지 누적 판매량 8만 병을 돌파했다.
국순당은 페트병 대신 350mℓ 캔 포장용기에 막걸리를 담아 재미를 톡톡히 봤다. 지난 7월 내놓은 ‘1000억 프리바이오 막걸리 캔’은 가격이 2500원으로 수입 맥주와 같지만 출시 후 25만 캔이나 팔렸다.
|
▲ 국순당 쌀막걸리. |
부담스럽지 않은 용량을 선호하는 젊은 소비자의 반응이 좋았고 특히 코로나19 이후 늘어난 캠핑족들이 간편하게 휴대할 수 있는 막걸리 캔을 선호하면서 판매량이 늘었다.
9월 선보인 전남 고흥산 유자과즙을 넣은 유자막걸리 ‘달빛유자’도 비슷한 제품이다. 과일향 등 색다른 맛을 원하는 2030세대를 겨냥했다.
▶ 이젠 배달도 한다
코로나19가 1년 동안 장기화하면서 집에서 마시는 '홈술족'과 '혼술족'이 늘어났다. 막걸리도 이 시장을 노리고 있다. 알코올 도수가 높지 않아 집에서 간단히 즐기는 술 시장 진입을 노리는 것이다.
‘느린마을 막걸리’로 알려진 배상면주가는 1월 온라인 주류 판매 플랫폼인 ‘홈술닷컴’을 오픈하며 막걸리 정기구독 서비스를 선보였다. 기간과 수량을 선택할 수 있다. 정기구독 고객에게는 10% 할인해 준다.
|
▲ 홈술닷컴 이미지. |
전통주 당일배송 서비스도 시작했다. 배송 서비스인 ‘오늘홈술’은 오후 3시 이전에 주문하면 당일 오후 8시까지 배달해 준다. 막걸리뿐 아니다. 김치전, 녹두전, 해물파전, 쇠고기 육전 등 ‘느린마을 전 골라 담기’도 함께 배달한다.
업계는 막걸리도 점점 마시기 좋은 술로 인식되고 있어 시장이 열리고 있다고 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차세대 소비의 주축으로 떠오른 MZ세대를 외면하고서는 막걸리 업계가 살아남을 수 없다는 위기감이 반영된 행보”라며 “소규모 양조장이 제공한 변화의 단초를 기존 대형 업체들이 빠르게 흡수하며 시장 자체가 변화하는 선순환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 규제 완화가 막걸리 산업 키워
막걸리 시장이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것은 규제 완화의 영향이 크다.
지난 2015년 12월 맥주에만 허가했던 소규모 주류 제조 및 판매 면허가가 막걸리 등 전통주로 확대됐다. 세법이 개정되면서 1000ℓ 이상 5000ℓ 미만의 저장 용기만 갖추면 소규모 양조장을 운영할 수 있어 청년 창업가들이 개인이나 소규모 양조장을 만들어 크래프트(craft·수제) 막걸리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식당에서 직접 막걸리를 빚어 판매하는 ‘하우스 막걸리’의 등장도 이 시기다.
2017년부터 허용된 온라인 판매는 막걸리 시장의 판을 키웠다. 소규모 양조장을 운영하는 창업자의 판로 개척에 날개를 달아준 셈이다. 지역 특산주 면허만 있으면 언제든지 비대면으로 막걸리를 판매할 수 있다.
이에 발맞춰 전통주를 주력으로 취급하는 ‘전통주 전문점’도 빠르게 늘고 있다. 이들은 편의점이나 대형마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개성 있는 막걸리를 소매가로 판다. 최근에는 전통주를 병 단위로 파는 ‘우리술 보틀숍’도 생겨나고 있다.
온라인 전통주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최근 도매 주문 플랫폼도 생겨나고 있다.
‘벨루가브루어리’는 제조사 및 수입사를 최종 판매자와 연결하는 기업 간 거래(B2B) 플랫폼을 출시했다. 전통주가 위스키, 맥주, 와인 등과 함께 구매 목록에 포함돼 있다. 음식점, 또는 주류 판매점이 온라인쇼핑몰에서 제품을 살펴보면서 구매할 수 있도록 했다. 시중에서는 쉽게 만나볼 수 없는 희소성 높은 막걸리들을 이 플랫폼을 통해 만나볼 수 있다.
|
▲ 벨루가브루어리의 로고. |
막걸리 산업이 외형을 갖추기 시작하면서 막걸리 마케팅, 시설 설비, 콘텐츠 기획 관련 종사자도 늘고 있는 추세다.
소규모 양조장을 운영하는 창업자의 경우 마케팅, 브랜딩 등을 전문가에게 맡기는 경우가 많다. 이는 기존에 위스키, 맥주 등을 다뤘던 인력들이 전통주 영역에서 활동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제품에 이야깃거리를 덧입히거나, 양조장을 중심으로 ‘양조장 투어’ 등 관광 상품을 개발하고 있다.
정부도 시장을 키우려는 의지가 상당하다. 농림축산식품부와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가 운영하는 전통주갤러리에서는 상설 시음회가 항시 열린다.
주류 업계 관계자는 “막걸리 시장은 여전히 맥주(3조 원)와 소주(2조 원) 시장 규모에 비하면 턱없이 작은 수준”이라며 “외형을 확장하기 위한 지속적인 변화가 시도돼야 한다”고 말했다. [플랫폼뉴스 강동훈 기자]
저작권자 ⓒ 플랫폼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