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21일)은 24절기 중 8번째 절기인 소만(小滿)입니다. 소만은 입하(立夏)와 망종(芒種) 사이에 들어 햇볕이 풍부하고 만물이 생장해 가득찬다고 해서 찰 만(滿)자를 썼습니다. 여름의 문턱인 셈이지요. 올해는 양력 21일로 '부부의 날'이기도 합니다.
이 무렵이면 씀바귀 잎을 뜯어 데치거나 무쳐서 나물로 먹습니다. 이른 봄에 나오던 냉이는 없어지고 보리 이삭이 익어 누런색을 띠기 시작합니다.
조선 헌종 때 정학유(丁學游)가 지은 가사집인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에는 '4월이라 맹하(孟夏·초여름)되니 입하, 소만 절기로다'라고 적었습니다. 이때부터 여름 기분이 나기 시작하며 식물이 왕성하게 성장합니다.
"사월이라 한여름이니 입하 소만 절기로다/ 비 온 끝에 볕이 나니 날씨도 좋구나/ 떡갈잎 퍼질 때에 뻐꾹새 자주 울고 / 보리 이삭 패어 나니 꾀꼬리 소리 한다/ 농사도 한창이요 누에치기 바쁘구나/ 남녀노소 일이 바빠 집에 있을 틈이 없어/ 적막한 대사립을 녹음에 닫았도다"(농가월령가 4월령 내용)
소만 무렵 농촌에서는 모내기 준비를 합니다. 이른 모내기, 가을보리 먼저 베기, 밭작물을 심기 위한 김매기 등 일거리가 줄을 이어 농민들로선 허리 한번 펼 시간이 없을만큼 바빠지는 시기입니다.
모판을 만든 뒤 모내기를 할 때까지 모의 성장 기간이 예전엔 40~50일 걸렸으나 요즘은 비닐 모판을 만들어 40일 정도면 충분히 자라고 소만 전후에 모내기를 시작합니다. 1년 중 가장 바쁜 계절로 접어드는 때입니다. 옛날에는 모심는 품앗씨(두레)가 있어 집마다 모심는 날을 달리해 서로 도왔었지요. 이를 울력의 일종으로 봐도 되겠네요.
농촌에서 살아본 사람들은 알지만, 모판에서 모를 쪄서 볏짚으로 묶은 모를 나르는 작업은 매우 고됩니다. 물논에서 쪄낸 모를 지게에 얹고선 발이 푹푹 빠지는 옆 논으로 나르는 작업은 여간 힘든 게 아니지요. 지게를 지고 논두렁으로 가다가 삐끗해 넘어지기도 합니다.먼 곳에 있는 논으로는 리어카(rear car)로 옮기는데, 신작로가 아닌 흙길이라면 이날 고생길은 훤하지요. 비오는 날이면 더합니다. 질퍽한 길에 리어카 바뀌가 빠져 고생한 기억들이 선할 것 같네요. 말 그대로 낑낑대며 처절하게 앞에서 끌고 뒤에서 미는 형국입니다.
또한 소만을 지나면 보리가 점점 누렇게 익어가고, 산과 들의 식물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때이기도 합니다. 산에서는 부엉이 울음소리도 자주 들립니다. 이 무렵 봉숭아꽃도 피어 열아홉 순정의 처녀들은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이는 풍습도 있습니다.
형편이 곤궁하던 옛날에는 이 무렵 '보릿고개'란 말이 있을 정도로 양식이 떨어져 힘겹게 연명하던 때입니다.
쌀은 떨어져가고 보리가 익으려면 기다려야 하는, 참으로 한 많은 보리가 아니었던가 싶네요. 그나마 산과 들에는 온갖 생물들이 자라나 잎과 줄기, 뿌리와 껍질을 따고, 캐고, 벗긴 뒤 무치고, 삶고, 버무려서 허기를 채웠다고 합니다. 이른바 초근목피(草根木皮)의 시절입니다. 요즘 별미로 찾는 쑥버무리가 당시 쌀 몇톨(쌀가루나 밀가루) 넣고 주식으로 먹던 것으로 보면 되겠습니다. 적은 양으로 여럿이 먹으려고 죽을 쑤어먹기도 했습니다. 이를 풀죽이라고 했다네요. 그것도 어디 배불리 먹었겠습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만물에 푸르름이 가득하고 풍족한 것 같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굶주림의 보릿고개 시절인 셈입니다. 꼭 이 시절만은 아니지만 장년층은 바로 윗대 어른들에게서 "배가 고파 물로 배를 채웠다"든지, "양식이 없어 쑥을 캐 쑥버무리를 해먹었다"든지, "소나무 껍질을 벗겨 속살을 씹거나 빨아먹었다"든지 여러 이야기를 듣고 컸습니다. 다들 그렇게 살았던 것 같습니다.실제로 나이 50대만 해도 어릴 때 송기(松肌)라고 해서, 새로운 솔가지에 물이 오를 때 이를 꺾어 액즙을 빨아먹기도 했습니다. 또한 송피떡이라고 소나무 속껍질로 만든 떡도 먹었습니다.
중국에서는 소만 입기일(入氣日)에서 망종까지의 시기를 다시 5일씩 삼후(三候)로 나누어 초후(初候)에는 씀바귀가 뻗어오르고, 중후(中候)에는 냉이가 누렇게 죽어가며, 말후(末候)에는 보리가 익는다고 했다네요. 씀바귀는 꽃상추과의 다년초인데 뿌리와 줄기, 잎을 식용으로 널리 쓰입니다.
초후를 전후해 연한 죽순을 따다가 고추장이나 양념에 살짝 묻혀먹는 것도 별미입니다. 죽순은 버섯과 같이 아작아작 씹어먹는 식감이 좋고 맛은 담백합니다. 피로를 회복시키고 원기를 돋우는데 좋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죽순 맛을 한번 보면 상장(喪杖·상을 당할 때 짚는 지팡이)도 부수어 먹는다'는 속담도 있네요. 또 '가죽자반'이라 해서 가죽잎을 따 고추장을 묻혀 말린 뒤 주전부리로 먹었지요. 이를 가죽부각이라고도 하더군요. 가죽은 참죽만 식용이 가능하고, 개죽은 못 먹습니다.
소만 무렵엔 보리가 익은 추맥(秋麥)과 대나무 잎이 누렇게 변하는 죽맥(竹麥)이 나타납니다.
모든 산야가 푸른데 유독 푸른빛을 잃고 누렇게 변한 대나무도 볼 수 있습니다. 새롭게 나오는 죽순에 영양분을 공급해 주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어린 자식을 정성들여 키우는 우리의 어머니의 모습이라고들 하네요. 그래서 이 시절의 누런 대나무를 가리켜 죽추(竹秋)라고 부른답니다.
▶ 속담
- 소만 바람에 설늙은이 얼어 죽는다. 소만 추위에 소 대가리 터진다 / 이 무렵에 부는 바람이 몹시 차고 쌀쌀하다는 뜻입니다. 기온차도 커 감기에 걸리기 쉬운 때이지요. [플랫폼뉴스 정기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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